흑사병은 몽골 제국의 영토였던 중앙아시아 또는 인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비잔티움 제국을 통한 중국, 아랍, 유럽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흑사병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다. 몽골의 후예가 유럽 정벌 과정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군인의 시체를 투석기로 던져 유럽에 흑사병이 퍼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인종적 편견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흑사병은 상인과 난민들 그리고 여행객 등을 통해 전파되었다. 당시 직물과 향신료 교역은 유럽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었는데, 그 중 모직물과 쥐의 털은 벼룩이 서식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1347년 원나라와 인도, 아라비아의 직물과 향신료 등을 실은 상선은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해 베네치아와 나폴리, 시칠리아와 제노바에 상륙했다. 흑사병은 이탈리아를 넘어 프랑스와 스페인, 영국, 스칸디나비아 반도, 모스크바까지 도달했다.
흑사병에 걸리면 보통 24시간 내에 피부색이 검게 변하면서 사망하였다. 발병 원인은 물론 치료법도 없었던 당시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1347년부터 1352년까지 유럽 인구의 30~40%가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정확한 수치는 없지만 수천만 명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흑사병 이후 사회는 어떻게 변화였을까? 살아남은 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호전되는 이점을 누리기도 하였다. 인구가 줄면서 기근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되었고,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농노들이 유리한 위치에서 거래처나 지주들과 협상을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세를 지탱해왔던 장원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영주의 영향력도 쇠퇴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우리나라도 특정 종교가 집단 발원지가 되었었는데, 그 당시 교회 역시 기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해 집단 발원지가 되었었다. 교회의 많은 성직자들과 사제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교회와 신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신권이 하락하고 왕권이 강화된 것이다. 흑사병의 대유행을 끝낸 것은 신에 대한 믿음과 기도가 아닌, 국가 시스템에 대한 위생과 검역 절차였다. 15세기 들어 유럽 각국은 방역 시스템을 갖추고 여행증명서를 발급했다. 아주 오래 전 일이지만, 흑사병의 이러한 유산들이 최근 코로나19 사태에서의 검역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 특징 중 하나는 인본주의를 싹트게 했다는 것이다. 부를 축적하기 시작한 무역상 및 은행가들은 기독교의 설교나 윤리적 규범에 넘어가지 않았고, 예술가, 철학자, 인문학자, 수학자들에게 큰 후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는 피렌체의 전성기를 이끈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에 더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천재들에 의해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흑사병으로 인해 중세 유럽은 붕괴하였지만, 검역 시스템의 발전, 그리고 인본주의와 르네상스 등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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