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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이야기

[질병이 불러온 변화 3] 콜레라와 도시 인프라 건설

인도네시아 중부에 위치한 활화산인 '탐보라 산'에 대해 들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1815년 4월 이 탐보라 화산이 폭발했다. 화산이 분출한 재는 인근 600km 반경 내 지역을 이틀간 어둠으로 덮었고, 폭발 소리는 2,600km 떨어진 수마트라에까지 들렸다고 전해진다. 이 폭발로 1816~1817년 세계 평균 기온은 0.7도 낮아졌고, 뉴욕에서는 6월에 눈이 내리기도 하였다. 아시아 전역에서는 흉작과 기근이 이어졌고, 당연히 아시아인들의 건강상태는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817년 인도에서 대규모 콜라레가 발발하였다. 콜레라에 감염 시, 세포는 전해질 부족으로 죽어가고, 삼투압 현상으로 몸의 수분이 계속 빠져나가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 콜레라는 1824년까지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1830년 모스크바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1815년 이후 유럽 대륙은 영국을 시작으로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많은 공장들이 생기자 시골의 젊은이들은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모여드는 인구만큼 도시의 주택 공급은 충분하지 않았고,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열악하고 좁은 공간에서 붙어 살았다. 주택 공급이 부족하니 당연히 상하수도나 정화조 같은 시설 역시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시기, 모스크바까지 퍼진 콜레라로 인해 주민들은 대규모 피난길에 나섰다. 최소한 코로나19처럼 증상이 없이 확진자가 나오는 경우와는 다르게, 콜레라의 증세는 명확했고, 환자의 구분 역시 쉬웠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국경 차단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콜레라는 폴란드와 프로이센을 넘어 1831년에는 베를린까지 도달하고야 말았다. 우리가 알고있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 역시 콜레라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다. 

 

독일을 휩쓴 콜레라의 다음 목적지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당시 콜레라의 원인이 악취나 나쁜 공기라는 주장이 있었는데, 런던의 의사였던 존 스노우(John Snow)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직접 질병 지도를 만들어 가구 방문을 통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병의 원인이 공기가 아닌 식수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세균학자인 파스퇴르(Pasteur)와 코흐(Koch)에 의해 콜레라균, 페스트균, 탄저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세균성 전염병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파스퇴르는 나폴레옹을 누르고 프랑스인들이 선택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될 정도였다. 

 

콜레라는 당시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을까? 유럽 사회는 콜레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활환경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주요 도시들의 운하를 정비하였으며,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상수도와 하수도를 건설해 나갔다. 정화조 인프라 역시 구축되었으며, 현대적 위생학, 미생물학, 세균학, 전염병학의 체계도 수립되었다.